고야의 동판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라파엘전파의 여성들, 예술과 철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봅시다.
고야의 동판화
예술가로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경력에는 아주 흥미롭고 모순되는 요소가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관료사회에서의 커다란 성공을 즐겼고, 궁중, 귀족 계층, 교회로부터 중요한 주문을 받았다. 그는 또한 상당한 명예를 얻었고, 왕실 화가가 되었으며,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 아카데미의 책임자였다. 같은 시기에 그는 어두운 면도 갖고 있었는데, 마법, 폭력 그리고 죽음의 악몽 같은 이미지를 제작했다. 그는 대부분 자신의 생생한 작품에서 이를 위한 최고의 배출구를 찾아냈다. 고야의 예술에서 비관주의적인 중압감은 1792~1793년 겨울에 있었던, 거의 생명을 앗아갈 뻔한 질병에서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요양 중에 자신의 상상에서 나온 소재로 작은 그림 연작을 만들었다. 고야는 이것이 그의 평범한 일상으로부터의 반가운 변화임을 발견했다. 그는 1799년에 공개된 그의 위대한 첫 번째 판화집에서 이러한 생각을 개진해 나갈 수 있었다. 이 판화집은 80장의 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에칭과 애쿼틴트의 조합이었다. 각각의 이미지에는 수수께끼 같은 설명과 간단한 해설이 수반되어 있었다. 이 연작을 광고할때, 고야는 이 주제들을 관습, 미신 그리고 무지로부터 나온 천박한 편견과 함께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인 어리석음과 실수에 대한 풍자로 기술했다. 비록 많은 평론가가 특정 유명 인사들의 캐리커처로 이 에칭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카프리스는 매우 인기를 얻었으며 고야의 평판을 높였다. 고야의 가장 유명한 판화집인 전쟁의 참상은 그러한 모호성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다.이것은 반도 전쟁의 공포에 대한 예술가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충돌은 프랑스 군대와 민간인과의 사이에서, 서로에게 잔혹 행위를 하면서 벌어졌던 게릴라전 형태로 발생했다. 편파적인 관점 없이 생생한솔직함으로, 고야는 일련의 폭력을 보여주었다. 이런 작품들은 예술분야의 진정한 돌파구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라파엘전파의 여성들
라파엘전파 형제회는 신비한 분위기의 예술 단체이다. 그들은 초기 이탈리아 예술의 새롭고 자연스러운 접근을 찬탄했고, 이에 근거하여 단체 이름을 지었다. 많은 여성 화가들이 직면했던 첫 번째 장벽은 제대로 된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술계에 친척이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장점이었다. 루시와 캐서린 매독스 브라운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훈련을 받았다. 또한 아버지를 위해 모델이 되었고, 아버지의 작업실 보조로 일했다. 이와 유사하게 각각 자신들의 남매에게 가르침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몇몇 화가들은 결혼을 통해서 라파엘전파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엘리자베스 시달이다. 예전에 여성용 모자 만드는 일을 했던 그녀는 모델로서 라파엘 전파를 위한 작업을 시작했고, 이후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에게 비공식적으로 수업을 받았으며 결국에는 그와 결혼했다. 반면에 솔로몬의 심판을 보여주는 스테인드글라스 창의 상징주의는 전형적인 라파엘전파의 특징이었다. 시달의 그림 중 몇몇은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에서의 결혼을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로제티와 그녀의 걱정스러운 관계를 상기시킨다. 에블린 드 모르간과 이 운동의 관계는, 윌리엄 모리스의 가까운 친구로서 이국적인 도자기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그녀의 남편 을 통해서 나왔다. 에블린은 또 다른 라파엘전파인 에드워드 존스의 그림 양식에 영향을 받았고, 초기 이탈리아 예술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예술과 철도
철도는 사회를 변화시켰고, 더 큰 이동성과 상업적 기회를 가져왔다. 철도는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여가를 보내는 방법도 변화시켰다. 주철 기둥과 유리 지붕을 갖춘 기차역은 이 시대의 대성당이었다. 예술가들은 철도라는 새로운 현상이 제공하는 기회를 빠르게 잡았다. 영국에서는 승객에게 중점을 두었다. 철도 여행은 전에 없이 사회의 여러 다른 가닥들을 결합시켰고, 일상생활에 대한 삽화에 영감을 주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실례는 윌리엄 포웰 프리스가 그린 기차역일 것이다. 당시 지은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런던의 패딩턴 역에 걸린 이 그림은 디테일로 가득차 있다. 프리스는 캔버스 중앙에 그의 가족과 함께 있다. 그는 딸의 가정교사를 외국 여행객의 모델로 사용했는데, 이 여행객은 역마차 마부와 다투고 있다. 오른쪽에는 런던 경찰국의 형사들이 범죄자를 체포하고 있다. 이 경찰들은 지역 유명 인사였고, 이 예술가를 위해 기쁘게 포즈를 취해주었다. 심지어 프리스의 중개인도 그림에서 보이는데, 그는 기관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그림은 엄청난 수익성을 보여주었다. 프리스는 입장료를 받기 위해 이 그림을 사적으로 전시했고, 이 장면을 찍은 판화로 많은 수입을 얻었다. 이 모험적인 사업의 인기로 다른 예술가들도 철도라는 소재와 씨름하게 되었다. 영국 해협의 반대쪽에서는 오노레 도미에가 철도 여행에 관한 주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평론가이자 풍자가로서 사회의 각계각층을 묘사했지만, 주로 가난하고 빈곤한 사람들에게 끌렸다. <삼등 객차>(1862-1864년경)는 그의 기차 그림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없어 보이는 한 가족의 삼대가 다른 승객들을 외면하고 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장벽을 암시하는데, 이 장벽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이들을 경제적으로 단절시킨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도 철로에 매혹당했다. 에두아르 마네, 귀스타브 카유보트 그리고 클로드 모네는 모두 파리의 생 라자르 역에 관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은 그들의 집에서 가까웠다. 이 주제는 근대적 삶을 그리겠다는 그들의 포부와 어울렸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들은 기차 또는 승객에게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기관차에서 나오는 증기였다. 개울의 잔물결이나 하늘의 구름처럼, 연기는 지나가는 매순간마다 변했다. 그리고 이것을 캔버스 위에서 잡아내겠다는 과업은 저항할 수 없는 도전을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