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의 출현과 발전,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해 알아보자

낭만주의의 출현과 발전에 대해서 살펴보고,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클로드 모네 작품

낭만주의의 출현

낭만주의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운동이며,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번창했다. 이것은 18세기 후반에 출현해서 19세기 전반에 꽃을 피웠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가치였던 명료성, 논리 그리고 질서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달했다. 이 반작용은 낭만주의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했다. 몇몇 경우에서, 이것은 개인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신고전주의 예술가에게 금욕과 자기희생은 그 시대의 명령이었지만, 낭만주의자는 저항 정신과 함께 가치 있는 대의와 투쟁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와 동등하게 낭만주의자는 그들이 자연의 커다란 크기와 힘 앞에서 개별자가 얼마나 작고 무의미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풍경 화가들은 이것에 집중했다. 이 반작용은 또한 이성 그자체에 대해 대항했을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취향이 있었다. 공포, 환상, 이국적인 것, 심지어 광기 그 자체에서 주제를 끌어냈다. 또 다른 의미에서, 낭만주의는 현실 도피의 요소를 갖고 있었다. 이 용어는 중세 ‘로맨스(romances)’에 기원을 두고 있다. 로맨스는 음유시인에 의해 퍼져 나갔던 사랑과 기사도 정신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19세기 동안 되풀이되는 주제였던 중세 소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취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한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산업혁명의 거대 도시화 그리고 시골 지역의 산업화 그 자체라는 현시대의 더 불쾌한 측면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을 표현했다.

낭만주의의 발전

이 운동의 넓은 범위를 고려한다면, 다양한 지류를 연결하는 시각적 양식이 없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낭만주의는 각각의 나라에서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에서 이것은 주로 낭만주의파 VS 고전주의파의 논쟁과 연관이 있다. 이 논쟁은 1820 년대에 살롱이라는 격전지에서 발생했다. 이 두 진영의 지도자는 들라크루아와 잉그르였다. 문제는 1824년 들라크루아가 살롱에서 그의 작품인 키오스 선의 대학살을 전시하면서 발생했다. 이 유혈과 폭력이 난무한 대학살 사건은 그리스 독립 전쟁의 일부였는데, 이 전쟁은 낭만주의 운동의 매우 유명한 쟁점 사안이었다.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원천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두 가지 이유로 비평가들의 분노를 샀다. 첫째, 그림은 진지한 예술가의 분야라기보다는 언론인의 분야로 여겨졌던 부분인 근대 시대의 소재를 나타냄으로써 살롱의 전통을 어겼다. 둘째, 들라크루아의 맹렬한 붓놀림과 거리낌 없는 색채의 사용은 살롱에서 기대됐던 매끄럽고 섬세한 미학을 선호하는 보수적인 해설자의 눈에는 미완성처럼 느껴졌다. 3년 후 그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선보였을 때, 들라크루아는 다시 머리 기사를 장식했다. 바이런 경의 희곡에 근거한 이 그림은 충격적인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평가들은 경악했다. 혼란스러운 구성은 물론이고, 왕이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대량 학살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에서 낭만주의의 지도자들은 다른 분야에서 다양하게 종사했다. 헨리 푸젤리는 환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소재에 이끌렸는데, 이 소재는 대개 공포, 잔인함 그리고 살짝 가려진 에로티시즘의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다. 반면, 그의 친구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그가 깊게 느꼈던 종교적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신비주의와 개별화된 신화의 조합을 사용했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

이 세기의 중엽에 지배적인 운동은 사실주의였다. 프랑스에서 귀스타브 쿠르베와 장 프랑수아 밀레가 이 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는데,이들은 엄청나게 큰 농부 그림으로 살롱의 단골손님들을 놀라게 해다. 한편으로는 이 그림들이 정치적이라는 점을 염려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운동이 더 넓은 의미에서 공식적인 전시 단체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반발이었기 때문이다. 유럽 전역에서 예술가들은 심사위원단과 선발 위원회가 부가한 규제에 대해 서서히 분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주요 살롱에서 거절당한 작품들의 전시회에서 더욱 드러났다. 이 발상은 ‘거절된 것’을 조롱하기 위해 시작됐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회에는 휘슬러, 피사로, 세잔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네와 같이 나중에 매우 유명해지는 수많은 예술가가 포함됐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실상 살롱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예술가들은 공식적인 전시회의 판매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들 소유의 전시회를 조직하고 그들의 작품을 시장에 내놓을 중개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향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개척했으며, 그들은 1874년과 1886년 사이에 여덟 번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첫번째 전시회에서 이 분파의 모임은 언론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인상주의 화가의 지도 원리 중 하나는 작업실보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물에서 잔물결을 이루는 반향, 구름 낀 날에 만들어진 그림자, 나뭇잎을 통해 여과된 햇빛 등 자연의 가장 순간적인 효과를 잡아내기를 원했다. 따라서 신속하게 작업해야만 했다. 이 위해서 그들은 획기적인 기법을 채택했는데, 사전에 공들여서 염료를를 섞기보다는 가장 강한 대비를 이루는 보색을 가볍게 칠하는 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관람객의 눈에서 혼합되었다. 살롱 그림의 세밀한 마무리에 익숙했던 동시대의 비평가들에게 이런 방식은 대충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서서히 이것에 익숙해졌고, 인상주의 화가의 마지막 전시회가 열릴 무렵에는 이 양식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인상주의의 신조는 유럽을 넘어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에까지 도달했다. 이 단계까지 프랑스의 몇몇 예술가들은 더 나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인상주의를 실험해봤지만, 더 중대하고 더 오래가는 주제와 씨름하기를 원했다. 폴 세잔, 조르주 쇠라, 폴고갱, 빈센트 반 고흐라는 네 명의 거인들이 이끌었던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은 근대 예술의 토대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