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코의 어원과 작품, 컨버세이션 피스의 유래에 대해 알아봅시다.

로코코의 어원과 주요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초상화의 한 종류인 컨버세이션 피스의 유래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컨버세이션 피스

로코코의 어원과 작품

로코코는 매우 장식적인 미술과 건축 양식이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바로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는 ‘로카이유(rocaille)’와 ‘바로코(barocco)’의 결합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로카이유는 장식용 조가비 및 암석 세공을 가리키며 분수와 석굴을 장식하는 데 사용됐다. 반면에 바로코는 바로크의 어원이다. 원래 로코코라는 용어는 조롱의 의미로 사용됐지만, 이제 더 이상 경멸의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처음에 로코코는 바로크의 너무 거창한 허세에 대한 해독제로서 발전했다. 거대한 궁전과 저택의 벽, 천장은 복잡한 알레고리로 덮여있었고, 후원자의 포부와 업적을 찬미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위대한 로코코 장식미술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또한 이러한 종류의 영양가 없는 소재와 씨름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경쾌한 솜씨와 유희적인 상상의 나래로 소재의 한계를 초월했다. 그는 베네치아, 우디네, 마드리드 뿐만아니라 독일 뷔르츠부르크 영주이자 주교의 궁전에 아주 호화로운 장식으로 귀족들의 눈을 황홀하게 했다. 이것보다 작은 규모에서 로코코는 마음 편히 즐길 수 있고, 우아하고 유희적이며, 때로는 성애적이기도 했다. 이 양식의 선구안을 가진 대표적인 천재는 장앙투안 와토였다. 그의 연극에 대한 사랑은 그가 완전히 새로운 회화 장르인 ‘페트 갈랑트를 창조하게끔 이끌었다. 이것은 아름다운 대정원에서 우아한 젊은이들이 참석하는 푸른 숲의 연회였다. 그들은 야회복, 역사적 복장, 이탈리아 희극 의상과 같은 좋은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시덕거리는 대화에 참여한다. 이러한 연회는 대개 연극에서 나오는 장면과 닮았는데, 사실 앙투안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키테라 섬으로의 출범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예술가는 오랫동안 잊혀진 연극의 결말을 꿈같은 환상으로 변형했고, 비너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연인들을 짝지었다. 그가 경력을 시작할 때 와토는 한동안 클로드 오드랑 3세를 위해 일했다. 그는 루이 14세의 궁전 몇 곳에 그림과 태피스트리 디자인을 제공했던 일류 장식미술가였다. 그의 감독 아래 와토는 중국풍, 아라베스크풍, 생주리 , 그로테스크풍 등 다양한 장식을 제작했다. 이것은 성공한 로코코 예술가에게 필요한 핵심 요구사항 두 가지가 다재다능함과 장식적매력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루이 15세의 재위 기간에 훨씬 더 분명해진 이러한 추세는 프랑수아 부셰의 경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가장 많은 작품을 생산하고 가장 성공한 로코코 양식의 대표자였다. 회화에 관해서는, 그는 아마도 신화적 장면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이 신화적 장면들은 해당 주제의 가장 초기 내용과는 상당히 다르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동안에 예술가들은 자주 신화적 인물을 사용하거나, 고전 문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삽화로써 사용했다. 심지어 가벼운 소재일 때에도 그들은 특정 전설을 언급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부셰는 이러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그에게 신화는 누드의 장식적 묘사를 위한 단순한 구실이었다. 예를들어, 고대 어떤 구절과도 유사점이 없는 비너스의 승리라는 작품에서 여신은 화려한 옷감에 덮여, 조개껍데기 같은 옥좌에 앉아 파도위를 가벼이 떠다닌다. 그녀의 머리 위로 천들이 휘날리고, 원형을 그리며 도는 아기천사 푸토들이 이 천을 하늘 높이 나른다. 한편 거품이이는 파도에는 벌거벗은 바다 정령과 해신이 주변에서 즐겁게 뛰논다. 로코코 시대가 열리면서 이러한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하였다.

컨버세이션 피스의 유래

18세기의 가장 유쾌한 초상화들 중 일부는 단란한 모습을 그린 컨버세이션 피스(conversationpiece)’인데, 주로 여가를 즐기는 가족 또는 친구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크기가 작고 가식이 없으며, 중산층의 가정에서 전시하기에 적합했다. 때로는 귀족이나 심지어 왕족도 주문했다. 이런 풍속화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이 말은 초상화의 한 유형을 일컫는다. 대개 크기가 매우 작으며, 비공식적이고 일상적인 배경에 실내나 실외에 있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전신 인물을 보여준다. 묘사된 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인다. 이 용어는 지인 또는 사회적으로 친밀한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는 ‘conversation’이란 단어의 예전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그림에서 다양한 초기의 선례가 있다. 하지만 이 유형의 그림들은 특히 18세기에 많이 제작되었고, 영국에서 가장 현저히 나타났다. 이 용어가 사용된 최초의 기록은 1706년 베인브릭 버커리지의 영국 학파에 관한 에세이에서 찾아 볼수있다. 이 책은 영국 회화의 역사를 서술한 최초의 시도였다. 버커리지는 이 용어를 마르셀루스 라룬의 작품과 연결해 사용했다. 라룬은 네덜란드 출신의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주로 취미로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룬이 그린 소모임 그림 속의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알아볼 수 있기보다 대개 일반화된 형태이다. 또 다른 외국 출신 화가인 독일 태생의 필립 메르시에는 지금 이해하고 있는 이 용어로서의 컨버세이션 피스를 영국에서 개척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1716년경 영국에 정착한 뒤 1725년에 그의 첫 번째 제작으로 알려진 컨버세이션 피스를 그렸고, 1739 년에 조지 2세의 아들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의 제1화가로 임명된다. 컨버세이션 피스를 창작한 최초의 주요 예술가는 윌리엄 호가스였다. 그는 1730년대 초반에 상류층과 귀족의 가족을 묘사한 몇 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들로 그는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중산층 고객들의 성장을 반영하며 이 장르의 인기가 커져가면서 다른 화가들이 빠르게 그의 길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