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예술의 절정기에 대해 알아보고, 기마 초상화아 미니어처 초상화의 탄생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 보겠습니다.
르네상스 예술의 절정기
대략 1500년에서 1520년까지의 기간에 걸친 전성기 르네상스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예술의 절정기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 르네상스 예술은 규모와 복잡성에서 특히 야심차고 원대해진다. 이 시기에 일어난 중대하고 기념비적인 발견과 정치적, 종교적 충돌이 세상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을 흔들어 놓았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고, 1522년에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를 배로 일주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는 이탈리아를 침략했고, 이는 이탈리아전쟁으로 알려진 일련의 분쟁으로 전개됐다. 이 분쟁은 1559년까지 지속됐으며 여러 유럽 국가와 오스만 제국이 연루됐다. 1512년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보다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는 동안 유럽 전역의 정치적, 종교적 긴장은 악화되고 있었다. 1517년 독일인 성직자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인쇄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관행을 거부하면서, 유럽 전체는 종교적 혼란에 빠진다. 이는 광범위하고 오랜 불화로 이어진 종교개혁을 촉발시켰고, 1527년 로마의 약탈과 함께 끝이 났다. 전성기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원래 1550년 조르조 바사리가 사용했다. 그는 예술가들의 성과를 ‘완전무결’이라 기술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무엇보다도 미를 그리고 형식과 색채의 조회를 얻기 위해 사실주의와 고대 그리스 및 로마 고전 예술에 대한 모방을 조합했다. 이 용어는 흔히 예술적 전개와 역사적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이유로 미술사학자들의 비판을 받지만, 전통적으로 이탈리아에서 특별하게 일어난 창의적인 천재의 시대로 받아들여진다. 초기 르네상스가 주로 피렌체에서 일어나고 메디치 가문에서 자금을 지원받았지만, 전성기 르네상스는 재정적 지원의 대부분을 로마 교황으로부터 받았다.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을 시작해 교황 후원의 선례를 마련한다. 그는 건축가를 고용하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에게 바티칸의 프레스코화를 주문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더불어 이들은 인본주의 사상, 발명, 기술적 기량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였다. 베네치아는 해양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예술의 거대한 중심지로 발전했다. 베네치아 르네상스는 주로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을 통해서 강렬한 색과 빛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벨리니의 제자들에 의해 현저하게 확장됐다. 베네치아의 예술은 색채에 초점을 맞추어, 초점을 둔 피렌체의 예술과 직접적으로 대조됐다. 1520년경에 몇몇 예술가들은 나중에 매너리즘이라 알려진 양식으로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양상들을 과장하기 시작했다.
기마 초상화
기마 초상화는 르네상스부터 계속해서 왕실의 위엄과 권력이란 관념을 나타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작품을 그리는 예술가들은 흔히 그들의 소재를 실제보다 돋보이게 했으며, 가장 훌륭한 본보기가 되는 그림 중 몇 점은 시각적으로 뛰어나며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변형되는 경이로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기마상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만들어졌으며, 중요한 작품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실물보다 큰 유명한 청동상이다. 기마상 형식은 르네상스에서 부활했으며, 특히 15세기 조각에서 가장 훌륭한 걸작 두 점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파두아에 있는 도나텔로의 가타멜라타 기마상(1443-1453년)이고, 다른 하나는 베네치아에 있는 베로키오의 콜레오니기 마상(1481-1496년)이다. 피렌체 성당에 있는 파올로 우첼로의 존 호크우드 경과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니콜로 다 톨렌티노는 기마조각상을 모방한 인상적인 프레스코화이다. 하지만 그림으로 그려진 기마 초상화의 전통은 실제로 한 세기 후에 티치아노가 그린 황제 카를 5세의 기마상과 함께 시작된다. 이 초상화는 전년도에 벌어진 뮐베르크 전투에서 카를 5세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다.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카를은 차분한 권위가 넘쳐흐른다. 실제로 카를은 통풍으로 심하게 고생하여 가마에 실린체 전쟁터로 옮겨졌으며, 기마 초상화를 그리는 많은 다른 화가들도 적합한 영웅적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이와 비슷하게 사실을 변경했다. 카를 1세의 궁정 화가인 안토니 반다이크는 소재를 실제보다 돋보이게 하는 데 달인이었다. 카를은 태도에는 위엄이 있었지만 키가 작았다. 그래서 반다이크는 영리하게 낮은 시점에서 그를 묘사하여 부족한 키를 숨겼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역사적 사건의 정확한 묘사라기 보다는 아주 멋진 선전 활동이었다. 나폴레옹은 1800년도에 이탈리아를 침략했을 때 안내자가 이끄는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지만, 그는 차분하게 사나운 말을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다비드는 그의 명령을 멋지게 따랐다. 다비드가 그의 걸작을 그릴 즈음에는 기마 초상이 더 이상 왕족, 귀족, 군대 지휘자의 이미지화가에 국한되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1663년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인의 기마 초상화를 그렸다. 비록 그 당시에 이런 초상화는 흔치 않았지만, 18세기에는 말을 탄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신사들에게 꽤 흔한 일이 됐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그림은 티치아노 반다이크 또는 다비드의 장엄한 실물 크기의 이미지보다는 훨씬 작았다. 권력보다 매력을 중시한 카롤루스 뒤랑의 말을 타고 있는 마드무아젤 크루아제트같은 초상화들과 함께, 19세기 동안 영역의 확장이 계속됐다.
미니어처 초상화
16세기 초반에 독특한 예술 형태로 출현한 미니어처 초상화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시대의 영국에서 융성했다. 특히 기법의 정교함에 있어서 니콜라스 힐리어드의 작품을 능가하는 것은 없었다. 예술사적 맥락에서 세밀화라는 단어는 두 개의 다른 회화 양식에 적용된다. 채색된 필사본에 있는 삽화와 그리고 매우 작은 초상화이다. 이 용어는 그러한 이미지들의 작은 크기에서가 아니라, 필사본에 자주 사용된 물감을 기술하는 라틴어 단어 미니엄에서 유래됐다. 작은 초상화는 가끔 필사본에 포함됐는데, 이러한 이미지를 독립적인 작품으로 창안하려는 발상이 1520년경에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미니어처 초상화가 최초로 확실히 언급된 연대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누이인 마르그리트 달랑송이 영국의 헨리 8세에게 두 개의 로켓을 선물로 보냈던 15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로켓들을 열면 초상화가 나오는데 하나는 국왕 프랑수아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두 아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두 개의 로켓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최초로 알려진 미니어처의 기원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 이 분야에서 최초의 주목할 만한 전문가는 루카스 호렌바우트였다. 그는 플랑드르에서 태어났지만, 생애 마지막 20년은 헨리 8세의 궁정에서 일하며 영국에서 보냈다. 호렌바우트는 헨리를 위해 일한 독일 출신의 위대한 예술가 한스 홀바인에게 미니어처 회화를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그는 완벽하게 호렌바우트를 압도했으며, 미니어처의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비범한 강력함과 위엄을 갖춘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의 작품은 모든 미니어처 화가 중 가장 유명한 니콜라스 힐리어드에게 영감을 주었다. 니콜라스 힐리어드는 미니어처 초상화를 영국 예술가와 특히 관련 있는 전문 분야로 만드는데 기여한 주요 인물이다. 그의 모델에는 특히 엘리자베스 1세,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 월터 롤리 경을 비롯하여 가장 유명한 동시대 인물 몇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미니어처 초상화는 둥근 모양이거나 타원형이며, 머리에서 어깨 혹은 흉상까지 그리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동전 크기보다 더 크지는 않다. 하지만 미니어처 화가들은 가끔 직사각형 모양을 사용했고, 힐리어드의 장미꽃 사이의 젊은 남자처럼 전신 인물에 적합하도록 조금 더 크게 만들기도 했다. 미니어처는 작은 상자나 캐비닛에 보관됐지만, 흔히 보석처럼 착용했다. 예를 들면 목에 두르거나, 가운 또는 심지어는 머리카락에 부착했다. 이러한 친밀하고 은밀한 작품들은 이상적인 사랑의 징표가 됐다. 힐리어드 이후로는 그의 시각적인 시에 근접할 수 있었던 대표자가 거의 없었지만, 미니어처는 19세기 중반 작은 사진 초상화가 일반적으로 미니어처를 대체할 때까지 계속해서 유럽에서 인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