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풍자, 귀족들의 여행, 고딕의 공포 문화에 대해 알아보자

예술에 있어서 풍자가 미치는 영향, 귀족들의 여행으로 발전과 고딕의 공포문화에 관해서 알아봅시다.

 

고딕문화

예술과 풍자

18세기는 시각적 풍자를 위한 황금시대임을 증명했다. 유럽과 미국에서의 정치적인 혼란과 계몽주의의 철학적 격동과 함께, 이 시대는 거침없는 논평을 공유하기에 적합했다. 이러한 동향의 초점은 영국이었지만, 풍자적인 작품은 유럽의 다른 국가와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격동의 시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매우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700년대 후반에 이것은 진지한 도덕적인 이야기부터 터무니없는 캐리커처까지 풍자적인 형식으로 표현된다. 18세기 풍자는 정치 카툰을 확립시켰고, 1800년대의 잡지와 같은 출판물들이 20, 21세기의 풍자적 경향을 위한 길을 닦았다. 이 세기는 많은 전쟁을 목도했고, 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영국에서 국왕 조지 3세의 정치는 불안정, 부패 혐의 그리고 즉위 불확실성으로 가득 찼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각 정당들의 정치적 경쟁이 권력을 장악하고 언론에서도 어느 정도의 표현의 자유가 지배적이었다. 이는 거침없는 논쟁을 조성했다. 이 논쟁을 풍자적인 이미지와 함께 출판하는 일은 18세기 후반의 출판 사업과 인쇄소의 성장으로 더욱 힘을 얻었다. 그리고 더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사상이 전달되었다. 산업화와 함께 도시의 꾸준한 팽창, 점점 더 도시화되는 세계관 그리고 토론 쟁점을 위한 더 큰 시장을 창출하는 교육받은 중산층의 발전이 다가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이러한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던 예술가가 없었더라면,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풍자적인 출판은 1500년대의 루카스 크라나흐와 같은 예술가의 출판에서 이어져 내려 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예술에 풍자적인 내용들이 스며 들게 되면서 예술과 풍자는 떨어질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귀족들의 여행

18세기 동안 특히 융성했던 귀족들의 여행은 부유한 젊은 남성들이 유럽의 위대한 문화 중심지들을 방문하여 교양을 쌓고 교육적 체험을 하는 여행이었다. 이러한 여행자 중 대다수는 예술과 유물에 돈을 낭비하며 지출했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젊은 귀족과 신사들이 이런 여행을 했지만, 이 여행은 무엇보다도 영국에서 온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 여행의 기원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시기에 여행은 지배 계급의 구성원이 외국 국가에 관한 유용한 지식을 얻으려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러한 여행은 점차 외교보다는 문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이탈리아의 주요한 예술 중심지는 귀족들의 여행의 최고 명소가 된다. 로마는 대부분의 여행에서 주요 목적지였고, 피렌체, 나폴리, 베네치아도 매우 인기가 있었다. 떠나는 여정과 돌아오는 여정은 흔히 프랑스를 통과 했고, 가끔은 저지대 국가 또는 중부 유럽을 통해서 가기도 했다. 1770년 무렵부터는 그리스를 방문하기도 했다.일반적으로 이 여행자들은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이었다. 대개 개인 교수를 동반했고 가끔은 하인을 동반했다. 일반적으로 여행은 대략 1년정도 걸렸지만, 어떤 여행자들은 더 오래 해외에나가 있었다. 특히 로마에서 이 부유한 방문자들은 예술가, 중개인, 안내자 그리고 기타 등등의 관계망에흡족해했다. 해외에서 거주하는 많은 영국 예술가들도 같은 시장에서 일하면서 생활 일부를 꾸려나갔다. 스코틀랜드 화가인 개빈 해밀턴은 그의 경력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는데, 로마에서 그는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 중개인이자 고고학자였다. 영국의 시골 저택과 미술관에 있는 풍부한 이탈리아 회화와 고전 유물은 대부분 이 여행의 유산이다. 18세기 중엽에 외국 여행은 전쟁으로 인해 한동안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1740-1748년)은 카날레토의 사업에 매우 크타격을 입혔고, 1746년에 그는 영국으로 이주하여 이후 거의 10년간 거기서 살았다. 이러한 귀족들의 여행이 미술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여행은 중산층에게까지 확산 되었다.

고딕의 공포 문화

고조된 초자연적인 센세이셔널리즘은 1700년대 후반기에 예술 및 문화에서 중요한 문화적 힘이 되었고, 18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이는 1700년대의 그것을 뛰어넘는 다른 형태가 되었다. 다양함, 로맨스 그리고 예기치 않은 것의 매력을 퍼뜨리는 관념들은 한편으로는 따분하고 절제되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극적으로 극단적이었다. 18세기 예술에서 ‘고딕풍의 (Gothick)’ 문화라는 명칭은 이러한 경향을 고취하는 데 일부 역할을 한 중세 시대의 폐허와 건물에서 왔다. 이 장르의 형식은 다양했다. 여기에는 장엄한 폐허의 극적인 표현, 숨이 멎을 듯한 알프스의 풍경, 문학의 선정적인 장면이 포함되었다. 그 시대의 사상가들은 한 폭의 그림 같거나, 아름답고 숭고한 관념에 몰두했는데, 흥미로운 불규칙성으로 자극된 상상력 때문에 하나의 취향이 생겨났다. ‘숭고’라는 용어는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과 연관됐다. 이러한 관념들은 풍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험프리 렙톤과 같은 대가가 고안한 거대한 정원에 그림 같은 암굴과 가짜 ‘폐허’가 등장했다. 화가들은 너도나도 이런 장면들을 그렸고, 정원 주인은 그림에서 영감을 찾았다. 귀족들의 여행중인 사람들은 험한 산길의 풍광을 만나고자 애썼고 자연의 장엄함에 맞설 때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가 되는지를 숙고했다. 이 모든 것은 강렬하고 변화된 정신 상태를 유발했다. 고딕 양식의 다른 측면은 대개 성적인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 섬뜩한 초자연주의였는데, 이것이 훗날 초현실주의와 공포 영화에 영향을 주는 ‘공포’의 초기 형식이 된다. 헨리 푸젤리는 중심적인 실행자였기고, 그의 작품 악몽은 1780년대에 영국 왕립미술원에 전시되었을 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푸젤리는 또한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영감을 찾았고, 서스펜스가 넘치는 문학 소설은 예술에서의 고딕 양식에 강한 상호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