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예술의 중요한 전화점이 되는 유화의 발명과 인쇄술의 성장으로 인해 인쇄된 책들이 사상의 확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유화의 발명
15세기 유화의 채택은 유럽 예술의 주요한 전환점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매체는 더광범위한 붓놀림을 가능하게 했고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할 수 있게 했으며,예술가들에게 작품 속에서 질감 변화의 새로운 깊이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선사했다. 오일과 혼합해 물감으로 사용하는 분말 안료의 기원은 적어도 기원 후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7세기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예술가들이 천연 안료를 갈아 호두나 양귀비씨 오일과 섞어서 바미안에 있는 고대 동굴 단지를 장식할 때 사용했다. 유럽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수단으로 오일을 사용한 것은 11세기에 처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범용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마씨 오일의 정제 방법에 개선이 이루어진 1400년대 이후이다. 플랑드르 예술가들은 오일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최초의 유럽인들이었다. 이탈리아 화가 첸니노 첸니니는 1390년대 후반에 쓴 예술 입문서에서 이탈리아 알프스 북부의 예술가들이 유화 물감을 사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때까지 분말 색소와 달걀을 혼합하여 만든 템페라가 유럽 화가들의 기본 재료였다. 유화의 선구자에는 얀과 후베르트 반에이크 형제, 로베르 캉팽 그리고 로히어로 판 데르 베이던이 포함됐다.유화를 다루는 얀 반에이크의 능숙함 때문에 수년 동안 그가 유화를 발명했다고 잘못 전해졌다. 그는 초창기에는 네덜란드, 에노, 제일란트의 통치자인 바이에른슈트라우빙의 요한을 위해 헤이그에서 작업했다. 하지만 1425 년 요한이 죽은 후 그는 릴에서 부르고뉴의 공작, 필리프 선공의 궁중 화가이자 외교관으로 고용되었다. 1429년 그는 브뤼주로 가서 남은 생을 보냈다. 그의 우아하고 세심한 화풍은 랭부르 형제의 섬세하고 장식적인 작품과 같은 필사본 채색으로부터발전된 것이다. 반에이크는 그 전문성으로 플랑드를 벗어난 지역에서도 알려진 최초의 네덜란드인이 되었고, 이후 이탈리아인들도 템페라보다는 유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화 물감의 더디 마르고, 보석처럼 밝고, 반투명한 성질에 대한 탐구는 초기 르네상스 회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얇게 발라진 유화가 이루는 연속적인 층은 더 큰 실험을 할 수 있으며, 더 가볍고 훨씬 범용성이 있는 캔버스로 나무패널을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인쇄술의 성장
인쇄된 책은 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발명 중 하나이며, 사상의 확산에 대변혁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 인쇄술의 주요 중심지였지만, 곧 다른 나라에서 이 기술을 습득했다. 목판을 사용해 책에 삽화를 넣는 기술도 빠르게 진전됐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용어인 인쇄술, 즉 다량으로 주조될 수 있는 가동 금속 활자를 사용하는 것은 15세기 중엽에 독일에서 발명됐다. 핵심 인물은 스트라스부르에서 1430년경에 인쇄술 실험을 시작했던 금속 세공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였다. 1448년에 그는 자기의 고향 도시인 마인츠에 작업장을 세웠다. 그리고 1455년에 위대한 성경의 제작을 완수한다. 현재 구텐베르크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 성경은 유럽에서 실질적으로 제작된 최초의 인쇄 책이다. 그의 발명은 빠르게 전파됐고, 1480년경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인쇄기를 보유했다. 영국 최초의 인쇄기는 1476년 윌리엄 캑스턴이 설치했다. 1500년경에는 대략 천 대의 인쇄기가 가동되고 있었다고 추정한다.구텐베르크 성경의 사본과 초기에 인쇄된 다른 많은 책들은 대개 채색된 필사본과 닮게 하려
고 손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인쇄된 삽화 또한 사용되기 시작했다. 14세기 말경에는 개별적인 목판화 인쇄가 제작됐고, 이러한 인쇄로 삽화를 넣은 책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6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책이 속표지에 겨우 한 개의 삽화만을 가지고 있었고, 품질도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1493년 하르트만 셰델의 세계 연대기가 출간되면서, 책에 실린 삽화의 역사에서도 주요한 전환점이 도래했다. 여기에는 전례 없이 600점 이상의 삽화가 사용됐다. 이것은 책에 삽입된 삽화가 본문을 장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출판물의 성격을 결정하는 최초의 인쇄된 책이었다. 이 연대기에 들어 있는 목판화 삽화는 알브레히트 뒤러를 가르친 미하엘 볼게무트의 작업장에서 제작됐으며, 이 책은 뒤러의 대부인 안톤 코베르거가 출간했다. 뒤러는 수많은 목판화 책 삽화를 제작했지만, 또한 동판화도 만들었다. 동판화는 결국 가장 삽화적인 목적때문에 목판화를 대체한다. 목판화는 어떤 면에서는 동판화보다 삽화에 더 적합했다. 목판화는 더 저렴하고 활판 인쇄에 사용하는 인쇄기와 똑같은 인쇄기에서 인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동판화는 더 육중한 인쇄기가 필요했고, 따라서 본문과 따로 인쇄해야 했다. 하지만 동판화는 더세밀하고 섬세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 커다란 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이것이 결정적인 요소였다. 16세기 말엽에 이르면 동판화가 매우 우세해져,목판화는 일반적으로 진지한 삽화보다는 연극 광고 전단처럼 가볍고 일시적인 작업에만 사용되었다.